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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세상의 소리를 잃어버리다. 

평범한 거실, 지극히 평안한 모습으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한 아이가 있다.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에도 돌아보지 않고 장난감에만 집중하고 있다. 연달아 불러도 여전히 반응이 없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어머니는 아이의 귀에 손을 가까이 대서 박수도 쳐보고 큰 소리로 불러도 보지만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장난감을 만지작거린다. 이때부터 세상의 소리를 잃어버린 4살 아이의 인생 여정이 시작된다.

어머니의 헌신과 사랑

청력을 잃은 내가 험난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을지 부모님은 염려와 불안감이 가득하셨다. 일반 아이가 가는 유치원은 가지 못하고, 농인을 위한 특수학교인 서울농학교에서 특수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청력을 잃은 상태에서 받는 언어 훈련은 어렵고 힘들기만 했다. 학교에서도 힘든데 집에서도 어머니에게 언어훈련을 받으니 더욱더 안하겠다고 버텨본다. 부모님도 그런 모습에 마음이 아프지만 언젠가는 세상을 홀로 살아가야 된다는 걱정에 마음을 강하게 먹고 단호하게 대하셨다. 함께 학교수업도 참석하고, 하교 후에도 훈련에 집중하는 일상을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계속되는 강행군에 눈물을 흘리고 마셨다. 어머니의 우는 모습을 처음 본 나는 어리둥절했다. 어머니는 울면서 나를 꼭 안고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이 모습에 나도 결국 울음이 터졌다. 이렇게 매일의 노력이 더해져 완벽한 발음은 아니지만 말하게 되고, 제법 똘똘한 모습으로 7살에 일반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비장애인들과 함께 동등하게 수업을 받게 된 것이다.

새로운 세상과 배움

아버지의 해외 발령으로 인해 가족들과 함께 싱가포르에서 3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부모님은 기후, 문화, 언어 등이 다른 싱가포르에서 내가 잘 지낼 수 있을지 많이 걱정하셨다. 기후, 문화는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적응이 가능하겠지만, 언어의 문제가 큰 변수였다. 몇 년을 투자해서 발음과 한글을 힘들게 깨우쳤는데 완전히 다른 언어인 영어를 새롭게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부모님은 막막해하셨다.

하지만 싱가포르의 덥고 습한 기후, 피부색이 다른 인종, 영어로 되어있는 표지판을 보고 두려워하기는 커녕 솟구치는 호기심으로 즐거웠다. 한인학교에서 비슷한 처치에 놓여있는 친구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잘 지내고, 새로운 것들에 흥미를 보이며 빠른 속도로 적응했다. 부모님은 사회성과 자립심을 키워주기 위해 테니스, 골프, 수영, 태권도 등 각종 운동을 배우게 하고 10여개 국가를 함께 여행하면서 새로운 경험을 쌓게 해주셨다. 그렇게 부모님의 아낌없는 관심과 지지 속에 건강하게 성장했다.

우정과 사람을 사귀는 즐거움

싱가포르의 3년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 학교 친구들은 싱가포르에서 온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며 온갖 질문을 던졌다. 비록 의사소통에 불편함은 있었지만 그 외에는 다른 친구들과 다를 바가 없었고, 장애는 큰 장벽이 아니었다. 친구들의 배려 덕분에 초. 중. 고 학창시절 내내 많은 추억을 만들고 깊은 우정을 쌓았다. 친구들이 생기면서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고 관계에 대한 소중함과 즐거움을 알게되었다.

나는 누구인가? 농인의 정체성

성인이 되어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다. 전공의 특성상 청각적인 요소를 많이 다루는 학업은 어려웠고 고민도 많아졌다. 그러다 ‘청각장애를 갖고 있어 남에게 도움을 받지만, 남을 도울 줄 알아야 한다’는 부모님의 가르침이 떠올라 사회복지학과로 복수전공을 하게되었다. 사회복지에서 성장 환경에 따른 사람의 욕구와 가치가 다양함을 배우고, 공감, 긍정적 존중, 경청 등의 실천 기술을 습득함으로 사람을 깊이 이해하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기독교 동아리에 들어가 4년간 임원을 하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사회가 무엇인지 점점 깨닫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서도 군중 속의 고독을 느꼈다. 사람들이 아무리 배려해줘도 늘 의사소통의 불편함은 있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는가?’, ‘나는 왜 다른 사람과 다른가?’에 대한 고민이 끊이지 않았다. 겉으로는 활발했지만 속에는 외로움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관계자의 권유로 농인 후배를 만나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와 비슷한 사람을 사귀어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동지가 생겼다는 기쁨이 컸다. 후배를 통해 농인 친구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 처음으로 수화를 배웠다. 수화를 하면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 더 정확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농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고, 사회에서 청인들과 의사소통을 하며 청각장애로 인해 겪는 어려움과 차별, 농인의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첫 홍콩 자유여행

졸업 후 취직을 했고 첫 휴가를 받았다. 농인&청인 친구들 4명이서 홍콩으로 첫 자유여행을 떠났다. 그동안의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치밀하게 잘 준비했다고 자부했는데 첫날부터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행기 도착시간이 새벽이라 빛이라곤 보이지 않았고, 간판도 보이지 않아 코앞의 게스트하우스를 찾는데 30분이 소요되었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은 연락이 되지 않아서 다른 투숙객의 도움으로 겨우 입실을 했지만 홈페이지 속의 사진과 소개와는 달리 많이 좁고 열악했다. 그런데 함께 간 친구들은 유쾌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그를 다독였다. 이후에 여행은 치밀하게 준비한 만큼 성공적이었다. 오히려 첫날의 당혹스러움이 큰 가르침을 주었다. 준비를 위한 준비가 아닌 사람을 생각하는 기획이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자유여행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여행업의 현실, 여행상점을 통해 만난 희망

그 이후 기회가 생기는 대로 농인 청년들과 함께 여행을 가기 시작했다. 농인 청년들과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 여행을 주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농인 청년은 농인들의 여행 욕구가 많은데 반해 환경은 여의치 않아 답답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현재 국내 여행사들 중에 농인을 위한 수화 여행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곳은 전무하다. 설사 개설된다 하더라도 수화통역사를 고용해야 하기에 추가 비용이 발생할 수밖에 없고 농인 수요가 많지 않아 수익성도 낮다는 것이다. 또한 농인 여행자가 패키지를 이용하면 여행사 측에서 배려해준다고 약속을 하면서도 정작 현지에 가면 패키지의 특성상 많은 사람들을 인도하다 보니 인솔자도 신경을 못 쓰는 상황이 된다. 이런 환경들이 농인의 여행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자연스럽게 농인들은 여행을 포기할 수 밖에 없다는 안타까운 이야기였다. 같은 돈을 지불하면서도 다르다는 이유로 누려야 할 혜택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일반 여행사 패키지 상품의 불합리함에 화가 났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여행을 청각장애로 인해서 충족 받지 못하는 현 여행업의 취약함을 개선해보고자 여행사 담당자에게 건의도 해보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고객의 욕구에는 관심이 없고, 수익성 하나만 바라보는 여행업의 구조에 실망한 그는 많은 농인들이 수화로 소통하면서 여행을 다니며 새로움을 느끼고 더 많은 것을 배우는 여행을 맛보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이렇게 고민하던 중 여행상점을 만나게 되었다. 여행상점은 기존에 만났던 여행사와는 다르게 “여행을 여행답게 만드는 건 결국 사람이다”라는 믿음을 표방하고 있었다. 여행을 만드는 사람들을 발굴하여 여행자들을 이어주는 활동을 하고 있는 여행상점을 통해 이우제만의 여행 작품 ‘수화로 소통하는 농인 여행’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고 큰 기대감을 갖고 여행상점과 동행하기로 결정했다! 아직은 혼자만의 도전이지만, 이런 작은 변화가 대한민국 농인 전체에게 아니 각자의 다름을 지니고 있는 모두에게 큰 변화를 선물하는 날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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