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메이트, 당신의 여행에 가치를 더해줍니다.          


작품이 없습니다.

여행이라는 이름의 가출

아버지가 엄했다. 저녁 7시가 아버지가 정해놓은 통행금지 시간이었다. MT는 물론이고 동아리 모임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항상 집으로 뛰어가야 했다. 대학 1학년이 되어서야 반항심이 올라왔다. 왜 이렇게 뛰어야 하는지 화가 났다. 친구와 여행 한 번 못 가보고 20대를 마감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그래서 친구와 여행을 계획했다. 친구는 여행이었지만 나는 가출이었다. ‘정동진 해돋이 여행’을 알아보며 ‘우정 여행’이라 이름 붙였다. 평소에는 집으로 뛰어가야 하는 시간에 집을 나와서 청량리역에서 친구를 만나고 1초도 눈을 붙이지 않고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정동진에서 해가 비상하는 모습을 보며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정말 찬란하다. 그리고 이제 죽었구나...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서 정동진에 왔음을 밝혔다. 엄마도 같은 생각을 했다. 정말 좋겠다. 그런데 너 아빠한테 죽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그 때는 정말 진지하게 목숨을 내놓았다. 이왕 내놓는 거 조금 더 즐기자는 생각으로 버스를 타고 경포대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친구와 함께 튜브 하나를 빌려 신나게 놀았다. 젊음은 튜브 하나에도 자지러졌다. 목숨을 내놓으려고 집으로 돌아와서 죽지는 않았지만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 그러나 괜찮았다. 그 날 누렸던 젊음은 아주 오래도록 찬란했다. 그리고 지금도 문득 해처럼 떠오르고 있다.

엄마의 꿈

엄마는 살림만 하는 게 꿈이었다. 새벽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살림까지 해야 했으니, 엄마에게는 그 꿈이 이루어질 수 없는 큰 꿈이었다. 그런데 그 꿈을 이룰 날이, 엄마의 삶에 도착했다. 아버지가 일을 시작했고, 엄마에게 살림만 해도 되는 날이 온 것이다. 그 날 엄마의 설렘은 옆에 서 있던 나에게도 전달됐다. 엄마는 기뻐하며 울었고, 나는 기뻐하며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버지는 꿈에 옵션도 있음을 밝혔다. 아버지의 지인들과 함께 부부동반 여행을 가기로 했다는 것. 엄마는 장난감을 선물 받은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그치고 웃었다.

여행을 떠나는 날, 엄마는 내 옷을 빌려달라고 했다. 남자친구와 맞춘 커플남방이었다. 대여료로 2만원을 제시했고 엄마는 50% 할인을 요구했다. 선심을 쓰는 듯 만원을 받고 옷을 빌려주었다. 엄마는 처음 소풍을 떠나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 모습을 보는 나와 동생도 덩달아 행복해졌다. 엄마가 택시를 타고 떠나자, 나와 동생은 더 행복해졌다. 엄마와 아버지가 없는 2박3일이라니... 꿈만 같았다. 친구들을 불러서 놀았다. 동생은 잠도 자지 말고 영화를 보자고,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왔다고 했다. 나는 “고고!”를 외쳤고 동생은 영화를 틀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10분쯤 지났을 때 동생의 음모를 알아챘다. 동생은 겁이 많은 나를 놀리려고 코미디 영화라고 거짓말을 하고 공포 영화를 빌려온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안 볼 수는 없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를 지르며 영화를 봤다. 자정이 지난 시간, 영화는 점점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벨이 울렸다. 올 사람은 없었다. 엄마와 아버지는 여행을 떠났고 남동생은 군대에 갔다. 잘못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을 때, 다시 벨이 울렸다. 동생과 함께 현관으로 나가 누구인지 확인했다. 이모였다. 이모는 같이 갈 데가 있어서 왔다고 했고, 우리는 이모를 따라 나섰다. 이모는 한참을 가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어디 가냐고 몇 번을 묻자 이모가 말했다. 놀라지 말라고, 여행을 가다가 엄마가 쓰러졌는데 별 일은 아닐 거라고... 동생과 손을 꼭 잡았다. 적막 속에서 강원도 원주의 한 종합병원에 도착했다. 엄마는 많은 호스들을 몸에 꽂고 중환자실로 이동하고 있었다. 의사는 뇌출혈이 이미 며칠 전에 시작된 상태에서 쇼크가 온 거라 며칠을 못 넘길 거라고 했다. 그리고 그 믿기 힘든 말은 사실이 되었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여행

2001년 9월 15일에 결혼을 했다. 형편상 신혼여행을 해외로 가는 건 무리여서 제주도로 선택했는데, 친구들이 나를 설득했다. “신혼여행 때 해외 가 봐야지. 아니면 평생 못 갈 수도 있어.” “신혼여행은 정당하게 가는 건데 나중에는 시댁이랑 친정 눈치 보여서 해외여행 쉽지 않아. 꼭 해외 가야 해.” 라는 말들에 설득 당했다. 하지만 해외에 어디를 가야 하는지, 평생 한 번 해외를 가는 거면 어디로 결정해야 현명한 건지, 무엇보다 예산이 맞는 곳이 있을지 고민했다. 결혼 전에 결정 해야할 수만 가지 중 하나이지만 가장 잘 결정하고 싶었다. 너무 어려웠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데, 한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캔 커피 광고였는데, 파란 바다가 눈에 확 들어왔다. 여행사에 문의했다. 그 광고의 파란 바다가 어디냐고. 인도네시아에 있는 빈탄 섬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거기로 가는 신혼여행 패키지가 있냐고 묻자 싱가폴과 빈탄을 함께 가는 패키지가 있다고 했다. 운명 같았다. 그 날 바로 그곳으로 결정하고 예약했다.

지금도 그 파란 바다를 보았을 때 감격은 잊히지 않는다. 신혼여행은 신혼여행이더라는, 얼마 전 결혼한 후배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신혼여행이라 더욱 그랬을 거라 생각한다. 처음이지만 마지막이라고 믿는 일에는 더욱 설렘이 따르는 법이니까. 신혼여행도 그런 일 중 하나니까. 그로부터 15년이 지나서야 남편과 해외여행을 가게 되었다. 둘이 아니고 넷이었지만, 남편과 나는 둘이 갔던 신혼여행을 떠올리며 얘기를 나누었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해외여행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고. 하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믿었던 것은 잘한 것 같다고. 그랬으니 지금의 여행이 더욱 기적을 만난 듯 행복할 수 있고, 그랬으니 그 여행의 1분 1초를 더욱 소중히 여길 수 있는거라고.

공유하는 행복한 삶

임신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고 <성경태교동화>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을 통해 나처럼 우울증을 앓는 산모들에게 밝음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래서 ‘헬로 베이비 태교학교’를 열었다. 스무 명 정도의 임산부들이 모여 동화를 읽고 음악을 듣고, 이미 아이를 출산한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위로와 웃음은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태교학교는 좋은 기억들을 많이 남겼다. 한번은 소풍을 갔는데, 산모들을 위해 도시락을 싸고 두런두런 앉아서 함께 할 그림 태교 재료들을 준비했다. 과천 현대 미술관에 가서 작품 감상도 하고, 도시락도 먹고, 태담도 하고 태교도 했다. 잔디 위에 돗자리를 펴면 산모들은 그저 소풍 온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나도 덩달아 함께 웃었다. 사랑을 주고 싶어 시작했지만 도리어 사랑받은 기억들이 떠오른다. 뭔가 해주고 싶다는 마음보다 함께 하는 마음이 더 좋은 것 같다. ‘야매상담’이라는 책에 썼던 것처럼 ‘행복은 자신이 먼저 행복하고 그렇게 행복한 삶을 공유하는 것’ 이라 생각해본다.

청소년들의 삶으로 떠나는 여행

우연한 기회에 청소년들을 만나게 되었다. 동네 놀이터에서 연기 나는 막대사탕을 물고 있는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함께 치킨을 먹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청소년들과 밥 먹는 사람으로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가장 좋은 여행은 청소년들의 삶으로 떠나는 여행이 아니었나 싶다. 진짜 해외로 여행을 떠나게 된 것도 청소년들 덕분이었다. 신혼여행 이후에 해외여행은커녕 국내 여행도 어려웠던 시절, 한 청소년 단체에서 연락이 왔다. 북경에 가서 한인 청소년들을 만나줄 수 없겠냐고. 마음이 힘든 청소년들을 만나는 사람이라고 들었다고. 참 기쁜 연락이었으나 많이 망설였다. 오직 그 아이들을 위해 사비로 비행기 값을 내고 가야했다. 한국에서 만나는 아이들을 먹이는 비용도 항상 부족했는데, 해외까지 갈 비용을 마련할 수 있을까? 꼭 그렇게 해야 할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아주 오래 밀려서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원고료가 입금되었다. 게다가 남편이 주 6일 근무에서 5일 근무로 바뀌면서 휴가를 쓰고 딸들을 돌볼 수 있게 되었다. 꼭 그 아이들을 만나러 갈 수 있도록 모든 것들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꼭 가야할 것 같은 마음에 비행기 표를 끊었다. 집을 비우기 전에 냉장고를 채우고 이런저런 당부를 하고, 만나는 청소년들에게  제발 며칠 동안 사고치지 않기를 부탁했다. 분주했던 마음이 비행기가 출발하니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청소년들 덕분에 북경에 가서 만리장성도 보고 땅콩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중국식 자장면도 먹어보고 자금성도 보았다. 무엇보다 빛나는 청소년들을 보았고 함께 울고 함께 웃었다. 역시 내게 최고의 여행은 아이들 삶으로의 여행이다.

모두가 행복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여행!

어느새 열여섯 살, 열세 살 딸을 둔 엄마가 되었다. 어느새 큰 딸은 나의 키를 훌쩍 넘었다. 마음의 키도 그만큼 자랐다. 작은 딸도 그랬다. 애교만점 작은 딸은 여전히 애교가 많지만 이제는 볼을 꼬집어 주는 게 어색할 만큼 자랐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먹고 사는 게 바쁘고 힘들어 여행을 떠날 엄두를 못 냈었다. 이제 엄두는 낼 수 있는데 일정을 맞추기가 영 쉽지 않다. 그래도 한번은 가족과 함께 해외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일정을 맞추려고 하니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와 상담은 방학 때 가장 많기에 방학 때는 안 되고, 남편은 유통업계에서 일하기에 명절을 포함하는 일정도 안 된다. 큰 딸은 뮤지컬 동아리 때문에 공연이 잡히면 아무데도 못 간다. 작은 딸은 학교와 교회에서 맡고 있는 게 많아 일정을 빼기가 어렵다. “겨우 네 명 일정을 맞추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어.” 라고 백 번은 말하고 나서야 일정이 맞춰졌다. 큰 딸이 일본을 가고 싶다고 했고, 작은 딸은 디즈니랜드를 원해서 도쿄로 떠나기로 했다. 비행기와 숙소를 예약하고, 동선을 정했다. 쉽지 않았다. 강의와 상담을 하고 원고를 쓰며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힘든 여행준비 끝에 발을 디딘 낯선 땅에서 왜인지 모를 홀가분함이 밀려왔다. 신혼여행이 처음이자 마지막 해외여행일거라고 믿었던 남편은 몇 번이나 신기하다고 말했다. 큰 딸은 연신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고, 작은 딸은 그저 함께하는 1분1초를 즐거워했다. 나는 그런 셋의 모습을 보며 행복해졌다. 우리 가족은 행복한 만큼 걸었고, 다리가 아픈 만큼 행복했다.


메이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